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대왕 (문단 편집) === 반론 === 프리드리히 2세가 아무리 외교를 잘한들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프랑스 왕국|프랑스]]-[[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삼부인 동맹'''을 막을 수 있었는지, [[로이텐 전투|로이텐]]에서 보여준 진형의 전환 같은 고난이도 전략을 다른 국가들의 전략가들도 구사할 수 있었는지,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을 러시아 서구화의 [[전범(동음이의어)#s-1|전범]](典範)으로 '''착각'''하고 무능력한 '''실수'''를 저질렀을지라도, 나중에[*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를 거쳐서] 나폴레옹, [[제1차 세계 대전]]으로까지 이어지는 프로이센 팬덤, 또한 프로이센 식의 군주제를 유럽의 전범(典範)으로 삼게 하는 그 영향력이 있는데도 과연 이를 과대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7년 전쟁]]은 손해를 무릅쓰더라도 [[슐레지엔]]을 찾으려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난만큼, 슐레지엔을 차지해 국력을 향상시켜던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또한 [[로이텐 전투]] 뿐만 아니라 다른 전투들에서도 흔하게 보여준 프로이센군의 진형 전환과 프리드리히 2세의 용병술은 다른 전략가와 국가들은 흉내낼지라도 완전히 재현하는 것이 힘든 수준이었다. 결국 인구 2~300만의 국가 프로이센이 그보다 10배에 가까운 거대 체급의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던 그 저력이 유럽 국가들에게 큰 감명과 충격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프로이센]]식 [[군주제]]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다민족국가]]들이 해체되고, [[민족국가]]들로 분할되며 [[민주주의]]가 형식상으로나마 정착되기 전까지는 국가 정치 체제의 [[전범(동음이의어)#s-1|전범]](典範)으로 남았다. 프리드리히 2세와 프로이센의 유산이 [[나치 독일]]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그들이 살았던 당대에 그들의 선택이 그들을 역사에 남도록 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한다. 이 점들을 무능력과 운의 산물로 치부기며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위인들의 업적을 단순한 무능력과 운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의 경우에는, 7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프로이센의 부흥을 이끈 대왕"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승리의 결정적 발판은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엘리자베타 여제의 적절한 시기의 사망과 이어진 표트르 3세와의 기적 같은 정전 협정이었다. 그의 능력을 떠나,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또는 표트르 3세가 점령한 땅을 배상금 등의 대가 없이 반환하는 비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프로이센의 운명과 프리드리히 2세의 평가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프로이센은 멸망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며, 만약 멸망하지 않았더라도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위대한 전술가로는 변함없이 남았겠지만, 동시에 프로이센을 파멸로 이끈 전쟁광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의 과대평가 주장이 강력해지는 이유는 위의 시나리오가 오히려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합리적인 가정을 배격하는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자세도 바람직하지 않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